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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방 ( 2 )/좋은글

신사임당(어머님을 그리며)

by 청 산 (靑山) 2013. 3. 22.

▲ 사임당은 서울 시집에 있을때 고향에 홀로 계시는 친정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시라고 합니다.

신사임당은 19세 때인 1522년(중종 17년)에 22세였던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했다.
이원수는 덕수 이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조부 이의석은 세종대의 부제학 최만리의 사위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부 이추는 대제학 윤회의 사위로 군수를 지냈지만 부친 때부터 가문이 영락하여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당대에 정승을 지낸 이기, 이행 형제의 조카뻘이었지만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아버지 신명화는 처가살이를 하며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키워줄만 한 사윗감을 찾은 끝에 그를 골랐던
것이다. 덕분에 신사임당은 혼인한 뒤에도 시댁으로 가지 않고 계속 강릉에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신명화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남편이 홀어머니가 계신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치오르는 슬픔을 삭이며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신사임당은 남편의 뜻을 좇아 시어머니가 사는 서울로
이사했다. 당시 신사임당은 늙으신 어머니를 북평 땅에 홀로 두고 대관령을 넘을 때 친정 쪽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그녀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었다.

서울 생활은 고달팠다. 이원수는 아직 과거 공부하는 선비에 불과했기 때문에 변변한 수입이 없었다.
결국 부부는 고심 끝에 대대로 시댁의 터전이었던 경기도 파주군 율곡리로 이사했다
그 때문에 훗날 아들 이이가 율곡(栗谷)이란 호를 쓰게 된 것이다.

그 후 신사임당은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홀로 사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돌보았다.
그러다 힘에 부쳤던 듯 시댁과 친정의 중간 지점인 강원도 평창에 거처를 마련하고 몇 년 동안 살기도 했다.
38세 때 신사임당은 서울의 수진 방에 집을 마련하고 시어머니 홍 씨를 모셨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을 절약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고 합니다.

 

 ▲ 대관령 구 길을 넘다 보면 정상에 위 시구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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