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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방 ( 2 )/감동글

한국 전쟁의 진정한 영웅 리차드 위트컴 장군 (감동)

by 청 산 (靑山) 2022. 12. 22.

한국전쟁 때 군수물자 빼돌린 미군 장군이 청문회에서 한 말

 

1,000일 하고도 23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가 부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산은 1,023일 동안 한국의 수도였던 적이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예고 없는 북한의 남침에 허를 찔린 우리 국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국토의 절반을 내준 채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철저한 작전계획과 38선 전역에서 일시에 퍼붓는 압도적인 화력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죠. 북한군은 계획대로 서울을 점령했고, 정부는 서울을 탈출해 대전으로 옮겼다가 대구를 거쳐 마침내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죠.

그리고 1950년 8월 18일, 부산을 임시 수도로 결정했는데, 말이 좋아 임시수도인 것이지 그 당시 북한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유일한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부산은 1937년 일제가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약 40만 명 규모로 계획한 도시였기 때문에 순식간에 늘어난 인구로 부산은 혼란이 가득했습니다. UN 참전군, 국군, 피란민까지 몰려들면서 1952년 부산의 인구는 85만 명을 넘어섰고, 그중 절반은 피란민이었습니다.

"살아있다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라는 말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향하면서 가족과 친구, 연인에게 습관처럼 했던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영도다리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가족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목이 쉬도록 이름을 부르던 아픔의 장소입니다.

그 슬픈 역사를 모두 이겨내고 이제는 대한민국의 제2 도시로 성장한 부산에는 UN 기념공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꼭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던 미국인 장군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떤 남자였을까요?

안녕하세요, 디씨멘터리입니다. 1954년 어느 날 미국 의회는 여느 때와는 달리 분주했습니다. 이날은 군법을 위반한 장군에 대한 청문회가 진행되는 날이었고, 표가 급한 의원들은 장군을 쪼아 진실을 밝힐 생각에 들떠 있었죠. 이 청문회에서 스타가 된다면 자신의 정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리처드 위트컴' 장군이 청문회장으로 들어섭니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의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질문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미군이 써야 할 군수물자를 담당하는 군수기지 사령관으로서 왜 군수물자를 함부로 빼돌렸느냐?"라는 것입니다.

사실 군수물자는 전쟁을 수행하거나 군인들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국민의 세금인데, 이를 다른 용도로 전용한다는 것은 심각한 군법 위반입니다. 자칫 군복을 벗거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심각한 중범죄였죠. 리처드 위트컴이라는 장군이 바로, 이 범죄를 저질렀죠.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모두 듣던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합니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믿습니다." 조용하지만 당당한 그의 이 말이 끝나자 한두 명의 의원에서 시작된 박수가 이어지더니, 급기야 대부분 의원이 기립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심각한 군법을 위반한 그가 어떻게 콧대 높은 국회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게 된 것일까요? 몇 개월 전 부산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4개월 뒤 부산에서는 예고된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을 중심으로 대화재가 발생한 것이죠. 이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사고였습니다.

잠시 언급했듯 부산은 30만 명을 목적으로 계획된 도시였는데, 전쟁 중 피란민 등이 몰리면서 인구수가 급격히 늘자 주거지를 비롯한 기반 시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판자촌이 등장했는데, 부산 어디든 공터만 있으면 판자촌이 형성됐죠.

그러나 판잣집의 증가에 따른 상수도와 전기 등 사회기반시설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는 목재로 만든 판자촌 여기저기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난로를 켜 추위를 달랬죠. 항상 화재 위험에 노출된 겁니다. 그렇게 하루에 몇 건의 화재가 발생하던 영주동 판자촌에서 난롯불 부주의로 인한 대형 화재가 시작됩니다.

11월 27일 오후 8시 20분, 부산 영주동 '허도영'의 방에서 시작된 화재는 시속 11.8km의 강풍을 타고 순식간에 판자촌 전체에 옮겨 붙더니, 급기야 부산역까지 옮겨 붙었는데요.

화마는 무려 14시간 동안 주택 3,132채를 불태우고는 사상자 29명, 이재민 3만 명을 거리에 나앉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는 했으나 부산에는 여전히 미군의 군수 기지가 남아 있었고, 당시 제2 군수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은 부산역 대화재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전쟁을 치르느라 여력도, 물자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상부의 보고도 없이 당장 군수물자 창고를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식량, 옷, 침구류 등을 전부 이재민에게 나눴을 뿐 아니라 예하 공병부대를 투입해 화재 복구를 지원하고, 3만 명이 지낼 임시 천막촌도 마련했는데요.

어쨌든 상부에 보고 없이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이고 무리한 구호 활동을 펼친 그를 '군수물자 무단 전용'이라는 죄목으로 청문회에 불러들였고, 여기에서 "전쟁은 총,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라는 위트컴 장군의 명연설이 나온 겁니다.

미 의회는 그의 명연설에 감동하여 면죄부를 주고, 더 많은 구호품을 지원해 위트컴 장군을 부산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살아있는 성자' 또는 '살아있는 천사'로 불린 위트컴 장군 일화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남자로 불렸던 그가 한국, 특히 부산에 남긴 흔적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미 의회의 면죄부 덕분에 위트컴 장군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고, 그는 1954년 전역했습니다만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982년 7월 12일, 서울 용산의 미 8군 기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 돌봄 사업을 포함 폐허가 된 부산 재건에 온몸을 바쳤죠.

그가 남긴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전쟁 피해자를 위한 병원 건립입니다.

1950년 4월, 부산 중구 대청동 4가, 현재 부산 가톨릭센터 자리에는 메리놀 수녀회가 진료소를 열고 무료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후에도 부상자와 피란민들이 끊임없이 밀려들면서 진료소의 시설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그는 종합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그리고는 병원 공사 비용을 모으기 위해 예하 미군 장병에게 월급 1%를 기부하도록 하고, 미군 대한 원조기금을 얻어왔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내려놓고 일부러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활보했습니다. 병원 건립 사실을 널리 알려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부산시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사령관으로서 체면을 구기고 구경거리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죠.

이 이야기는 미국의 주간지 'Life' 1954년 10월 25일 자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상 3층, 160 병상 규모의 메리놀 병원이 설립된 겁니다.

한편 그는 전쟁고아 돌봄 사업에도 힘썼는데, 천안의 한 보육원에 선물을 들고 찾았다가 평생의 반려자 '한묘숙' 여사를 만나게 됩니다. 보육원 원장이었던 그녀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인데, 죽기 전 그가 남긴 유언이 "나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찾아 고향에 보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그는 1982년 사망 후 미장군으로는 유일하게 UN 기념공원에 안장됐고, 한명숙 여사는 '위트컴 희망재단'을 만들어 온 재산과 연금까지 쏟아부어 유해 봉환에 힘쓰다 남편 곁에 영면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1월 11일, 'UN 참전용사의 날'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전쟁 폐허를 딛고 현재의 번영을 이루기까지 우리의 피땀만 흘린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낯선 땅에 찾아와 인류애를 실천한 위트컴 장군과 같은 이들이 있어 한국이 현재의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저 역시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11월 11일 'UN 참전용사의 날'을 맞아 '한국 고려홍삼' 측과 함께 잊힌 영웅분들을 위한 작은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조국을 잃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까지 참전하셨으나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계신 분들을 위한 행사였습니다.

한국 고려홍삼 측이 주최한 행사에 저 역시 디씨멘터리 구독자들과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참가했는데, 이날 행사에는 예비역 대령 '한태근' 박사의 안보 강연을 시작으로 '황윤정 소리국악원' 단원분들께서 민요 공연을 해 주셨고, '씽씽걸스'의 트로트 공연에 이어 한국 고려홍삼과 디씨멘터리 구독자 이름으로 후원 물품을 전달해 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있게 해 주신 위트컴 장군뿐 아니라

한국을 위해 희생해 주신 분들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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